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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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도갑사에 있는 문으로,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들어가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세워졌으며, 석조 기단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굽받침 없는 직선형 주두를 얹은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한 공포 양식과 봉정사 극락전과 통하는 외목 하부 양식을 보여준다. 고려 시대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로, 건축학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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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 도갑사 해탈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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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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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영암 도갑사 해탈문 |
로마자 표기 | Yeongam Dogapsa Haetalmun |
영어 이름 | Haetalmun Gate of Dogapsa Temple, Yeongam |
유형 | 국보 |
지정 번호 | 50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주소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사로 306, 도갑사 (도갑리)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도갑사 |
수량 | 1동 |
문화재청 ID | 11,00500000,36 |
2. 역사
도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4년(1473)에 수미·신미 두 스님이 도갑사를 다시 지었으며, 1960년 해탈문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2] 한국전쟁 때 도갑사의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었으나, 이후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부처님의 품 안에 들어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2]
2. 1. 창건과 번성 (신라 말 ~ 고려)
신라 말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자라 중국을 다녀온 뒤 이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수미·신미 두 스님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지었고,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린 것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2]2. 2. 중수와 소실 (조선 ~ 한국전쟁)
조선 성종 4년(1473), 수미와 신미 두 스님이 도갑사를 중건하였다. 1960년 해탈문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2] 한국전쟁 때 도갑사의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되었으나, 이후 다시 지어졌다.2. 3. 복원과 현재
도갑사는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타 버렸으나, 새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1]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절의 입구에 서 있다.[1] 해탈문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1]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1]
3. 건축
도갑사 해탈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절의 입구에 있다. 좌우 1칸에는 절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있고, 가운데 1칸은 통로로 사용된다. 건물 위쪽에는 도갑사의 정문임을 알리는 ‘월출산도갑사(月出山道岬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반대편에는 ‘해탈문(解脫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탈문은 모든 번뇌를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1960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세워졌다.[2] 석조 기단 위에 중앙 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 한 칸씩에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공포(栱包)는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굽받침 없는 굽의 단면이 직선으로 잘린 주두(柱頭)를 얹고 초제공(初諸工)을 결구하여 대량(大樑)을 받도록 하였다. 헛첨차는 주심(柱心)에서 단면이 장방형(長方形)인 창방(昌枋)과 맞추어졌고 외부 끝 아랫부분에는 쌍S자형 문양을 새기고 내부로는 초공(草工)이 되어 제1살미(山彌) 안쪽의 초공과 맞얹혀 양봉(樑棒)이 되었다. 주두 위 초제공에서 살미는 외부에서 초가지모양으로 새겨 대량머리를 받고 내부로는 헛첨차 내부와 같은 초공으로 되어 대량을 직접 받도록 되었다. 도리 방향의 주심에서 대량과 주두 사이에는 두공을 넣어 주심장여와 주심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가구(架構) 양식은 2중량(二重樑) 2가연(二架椽)으로, 앞뒤 기둥 위에 걸친 대량 위에는 보칸의 4분의 1 지점에 포대공(包臺工)을 올려놓아 종량(宗樑)과 중도리(中道里)를 받게 하였고, 종량 위에는 중심에 접시받침재를 놓고 2중 장여를 짜 올려 종도리(宗道里)를 받게 하였다. 접시받침재 위 보칸방향으로는 초공을 올리고, 종량을 받치는 포대공에는 우미량(牛尾樑)을 끼워 주심 위쪽의 부재들과 연결하였다. 보칸의 2분의 1 거리에 세운 포대공 위에는 종량을 올려 그 양 끝에 중도리를 직접 놓고 중심에 마루대공을 세워 중도리와 마루대공 사이에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넣어 종도리 하단 양쪽을 받치도록 하여 견고하고 합리적으로 처리되었다.
3. 1. 건축 양식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문(山門) 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2] 기둥은 약하게 배흘림을 한 둥근 기둥을 사용했으며,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경북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다.[2] 특히 기둥 위 구조는 주심포 양식과 다포 양식이 섞인 형태로, 대한민국에서 유례가 드문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2]공포 양식과 가구 양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분 | 특징 |
---|---|
공포 양식 | |
가구 양식 |
이러한 공포 및 가구의 세부 양식은 고려 중기 및 말기의 대표적인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수덕사 대웅전식 공포와 많은 유사점이 있으며, 외목 하부의 양식은 봉정사 극락전의 것과 통하는 수법이 보인다. 가구에 있어서도 소슬합장의 사용이나 우미량 등의 전승은 고려 말기 건축양식에 나타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구조상 무리한 낭비가 없고 의장상 장식 위주의 번잡함이 없다.
3. 2. 구조적 특징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문(山門) 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1]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굽받침 없는 굽을 가진 주두(柱頭)를 얹는 등 독특한 공포(栱包) 구성이 특징이다.[1]공포 구성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1]
-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웠다.
-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行工簷遮)가 없다.
- 주심도리가 대량 바로 위에 놓이지 않고 위로 올려져 분리되었다.
이러한 공포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같은 시기의 송광사 하사당, 관룡사 약사전과 같은 계통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1]
가구(架構) 양식은 2중량(二重樑) 2가연(二架椽)으로, 전후 기둥 위에 걸친 대량 위에는 보칸의 4분의 1 지점에 포대공(包臺工)을 올려놓아 종량(宗樑)과 중도리(中道里)를 받게 하였다.[1] 종량 상부에는 중심에 접시받침재를 놓고 2중 장여를 짜 올려 종도리(宗道里)를 받게 하였으며, 종량을 받치는 포대공에는 우미량(牛尾樑)을 끼워 주심 상부의 부재들과 연결하였다.[1]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 등 고려시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공포와 가구 양식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이 나타난다.[1]
해탈문의 공포 및 가구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공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주두와 소로의 굽 모양이 직선으로 깎였다. |
② | 제공은 기둥머리로부터 결구되었다. |
③ | 1단의 헛첨차와 1단의 살미첨차 위에 대량이 놓였다. |
④ | 출목은 외부로 1출목이며 내부는 초공식 양봉으로 되었다. |
⑤ |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가 없다. |
⑥ | 헛첨차 선단 하부에 쌍S자형 문양이 있다. |
⑦ | 주심선상의 도리방향에는 두공만이 있고 그 위에 2단으로 장여(長舌)가 짜여 올라갔다. |
⑧ | 헛첨차 위의 살미첨차 선단은 초가지새김으로 되어 있으나 쌍S자형 문양이 변한것에 불과하다. |
가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2중량 2가연으로 되어있다. |
② | 대량과 종량의 단면형은 호형(壺形)으로 되었다. |
③ | 대량 위의 대공은 포대공이며, 교두형 문양으로 되었다. |
④ | 종량 상부에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두었다. |
⑤ | 외목도리와 중도리는 대량과 종량 위에 직접 놓았으며, 주심도리는 우미량 위에 얹었다. |
⑥ | 우미량을 주심도리와 중도리사이에 사용하였다. |
⑦ | 가구는 우미량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직선재로 되었다. |
⑧ | 내진주(內陳柱)는 대량 밑에서 초공을 주두 위에 올려놓고 양봉으로 되어 대량을 받치고 있다. |
⑨ | 포대공의 최하단은 접시받침재로 되었다. |
3. 3.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
도갑사 해탈문의 공포(栱包) 구성은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굽받침이 없는 직선 형태의 주두(柱頭)를 얹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수덕사 대웅전 및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같은 시기의 송광사 하사당, 관룡사 약사전과 같은 계통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1]가구(架構) 양식은 2중량(二重樑) 2가연(二架椽)으로, 대량 위에 포대공(包臺工)을 올려 종량(宗樑)과 중도리(中道里)를 받치고, 종량 상부에는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두어 견고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1]
봉정사 극락전과의 비교에서 공통점은 출목(出目) 밑에 행공첨차가 없고, 최하단 살미첨차 외부 하단에 쌍S자형 문양이 있으며, 소로가 외목도리 바로 아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해탈문은 공포 최하층 살미첨차가 주두에서 전후좌우로 전개되지 않고, 보칸방향 살미 내부가 첨차형 짜임이 아니며, 주심선상 도리방향 두공 상부에 대첨(大簷)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1]
부석사 무량수전과 비교하면, 최하단 살미첨차 선단 하부의 쌍S자형 문양, 보머리 문양과 외목도리 받침 베개목 문양, 외목 1출목(一出目)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해탈문은 주두와 소로의 굽이 직선 형태이고, 굽받침이 없으며, 초제공(初諸工)이 주두로부터 짜여지지 않고, 살미 내부가 쌍S자형 문양이 아니며, 외목도리가 베개목 위에 얹히지 않고, 단장여와 행공첨차가 없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1]
수덕사 대웅전과의 공통점은 헛첨차의 존재, 제공 결구 양식, 외목 1출목 등이다. 차이점으로는 주두나 소로의 굽 형태, 행공첨차와 단장여의 유무, 주심선상 두공 위 장여와 대첨의 배치 등이 있다.[1]
부석사 조사당과의 비교에서는 주두 모양, 헛첨차, 제공(諸工) 한 조(組), 행공첨차 없음, 외목 1출목, 외목도리 밑 단장여 없음 등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조사당에는 초각된 부재가 없고, 살미 내부가 첨차와 같은 교두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1]
가구 양식에서는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점이 많으며, 소슬합장, 우미량 등의 전승은 고려 말기 건축 양식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구조상 낭비가 없고 장식 위주의 번잡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1]
해탈문의 공포 및 가구 특징은 다음과 같다.[1]
공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주두와 소로 형태는 굽 모양이 직선으로 사절됨. |
② | 제공은 기둥머리로부터 결구됨. |
③ | 1단 헛첨차와 1단 살미첨차 위에 대량이 놓임. |
④ | 출목은 외부로 1출목, 내부는 초공식 양봉. |
⑤ |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가 없음. |
⑥ | 헛첨차 선단 하부에 쌍S자형 문양이 있음. |
⑦ | 주심선상 도리방향에는 두공만 있고, 그 위에 2단으로 장여(長舌)가 짜임. |
⑧ | 헛첨차 위 살미첨차 선단은 초가지새김 형태. |
가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2중량 2가연 구조. |
② | 대량과 종량 단면은 호형(壺形). |
③ | 대량 위 대공은 포대공, 교두형 문양. |
④ | 종량 상부에 인(人)자형 소슬합장. |
⑤ | 외목도리와 중도리는 대량과 종량 위에 직접 놓임, 주심도리는 우미량 위에 얹음. |
⑥ | 우미량을 주심도리와 중도리 사이에 사용. |
⑦ | 가구는 우미량을 제외하고 대부분 직재. |
⑧ | 내진주(內陳柱)는 대량 밑에서 초공을 주두 위에 올려놓고 양봉으로 대량 받침. |
⑨ | 포대공 최하단은 접시받침재. |
4. 문화재적 가치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문(山門) 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2] 석조 기단 위에 세워진 해탈문은 기둥 위에 주심포식과 다포식 양식이 섞인 형태로, 한국 건축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
4. 1. 역사적 가치
도선국사가 신라 말에 도갑사를 창건하였고,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하였다고 전해진다. 1960년 해탈문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세운 것이다.[2]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부처님의 품 안에 들어선다는 의미를 지닌다.[2]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춘천 청평사 회전문과 비교되는 중요한 산문(山門) 건축으로, 한국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형태이다. 석조 기단 위에 세워진 해탈문의 기둥은 약하게 배흘림을 한 중근 기둥이 사용되었고,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다. 특히 기둥 위의 구조는 주심포식과 다포식 양식이 섞인 형태로, 한국 건축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
4. 2. 건축학적 가치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대한민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문(山門) 건축으로,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중요한 건물이다.[1]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굽받침 없는 굽을 가진 주두(기둥머리)를 얹는 등 독특한 공포(栱包) 구성이 특징적이다.[1] 이러한 공포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송광사 하사당, 관룡사 약사전과 같은 계통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1]가구(架構) 양식은 2중량(二重樑) 2가연(二架椽)으로, 대량 위에 포대공(包臺工)을 올려 종량과 중도리를 받치고, 종량 상부에는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두어 견고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였다.[1] 이는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 고려시대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공포 및 가구 세부 양식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인다.[1]
해탈문의 공포 및 가구 양식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공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주두와 소로형은 굽의 모양이 직선으로 사절되었다. |
② | 제공은 기둥머리로부터 결구되었다. |
③ | 1단의 헛첨차와 1단의 살미첨차 위에 대량이 놓였다. |
④ | 출목은 외부로 1출목이며 내부는 초공식 양봉으로 되었다. |
⑤ |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가 없다. |
⑥ | 헛첨차 선단 하부에 쌍S자형 문양이 있다. |
⑦ | 주심선상의 도리방향에는 두공만이 있고 그 위에 2단으로 장여(長舌)가 짜여 올라갔다. |
⑧ | 헛첨차 위의 살미첨차 선단은 초가지새김으로 되어 있으나 쌍S자형 문양의 변화에 불과하다. |
가구 양식
번호 | 특징 |
---|---|
① | 2중량 2가연으로 되어있다. |
② | 대량과 종량의 단면형은 호형(壺形)으로 되었다. |
③ | 대량 위의 대공은 포대공이며, 교두형 문양으로 되었다. |
④ | 종량 상부에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두었다. |
⑤ | 외목도리와 중도리는 대량과 종량 위에 직접 놓았으며, 주심도리는 우미량 위에 얹었다. |
⑥ | 우미량을 주심도리와 중도리사이에 사용하였다. |
⑦ | 가구는 우미량을 제(除)하고 대부분이 직재로 되었다. |
⑧ | 내진주(內陳柱)는 대량 밑에서 초공을 주두 위에 올려놓고 양봉으로 되어 대량을 받치고 있다. |
⑨ | 포대공의 최하단은 접시받침재로 되었다. |
이러한 특징들은 수덕사 대웅전식 공포와 유사하면서도, 봉정사 극락전의 양식과도 통하는 수법을 보여준다.[1] 또한, 고려 말기 건축 양식의 특징인 소슬합장, 우미량 등을 사용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낭비가 없고 장식 위주의 번잡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1]
4. 3. 예술적 가치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섬세한 조각과 장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기둥머리에 헛첨차를 끼우고 그 위에 굽받침 없는 굽을 가진 주두를 얹은 공포 구성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헛첨차 외부 선단 하부에는 쌍S자형 문양을 새기고, 내부로는 초공을 두어 제1살미 안쪽의 초공과 맞얹혀 양봉을 형성했다. 주두 위 초제공에서 살미는 외부에서 초가지붕 모양으로 조각되어 대량머리를 받치고, 내부로는 헛첨차 내부와 같은 초공으로 대량을 직접 받도록 했다.이러한 공포 구성은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며, 송광사 하사당, 관룡사 약사전과 같은 계통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가구 양식은 2중량 2가연으로, 대량 위에는 보칸의 4분의 1 지점에 포대공을 올려 종량과 중도리를 받게 했다. 종량 상부에는 중심에 접시받침재를 놓고 2중 장여를 짜 올려 종도리를 받게 했다. 접시받침재 위 보칸 방향으로는 초공을 올리고, 종량을 받치는 포대공에는 우미량을 끼워 주심 상부의 부재들과 연결했다. 보칸의 2분의 1 거리에 세운 포대공 위에는 종량을 올려 양 끝에 중도리를 직접 놓고, 중심에 마루대공을 세워 중도리와 마루대공 사이에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넣어 종도리 하단을 받치도록 했다.
해탈문의 공포 및 가구 세부를 고려시대 건물들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건물 | 공통점 | 차이점 |
---|---|---|
봉정사 극락전 | ||
부석사 무량수전 | ||
수덕사 대웅전 | ||
부석사 조사당 |
이러한 비교를 통해 해탈문은 수덕사 대웅전식 공포에 많은 유사점을 가지면서도, 외목 하부 양식은 봉정사 극락전과 통하는 수법을 보임을 알 수 있다. 가구에 있어서도 소슬합장 사용이나 우미량 등은 고려 말기 건축 양식과 유사하지만, 구조상 낭비가 없고 장식 위주의 번잡함이 없는 특징을 보인다.
해탈문의 공포 및 가구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포 양식
- 주두와 소로형은 굽 모양이 직선으로 사절되었다.
- 제공은 기둥머리로부터 결구되었다.
- 1단 헛첨차와 1단 살미첨차 위에 대량이 놓였다.
- 출목은 외부로 1출목이며 내부는 초공식 양봉으로 되었다.
- 외목도리 밑에 행공첨차가 없다.
- 헛첨차 선단 하부에 쌍S자형 문양이 있다.
- 주심선상의 도리 방향에는 두공만이 있고 그 위에 2단으로 장여가 짜여 올라갔다.
- 헛첨차 위 살미첨차 선단은 초가지붕 모양 새김으로 되어 있으나, 쌍S자형 문양의 변화이다.
가구 양식
- 2중량 2가연으로 되어 있다.
- 대량과 종량 단면형은 호형으로 되었다.
- 대량 위 대공은 포대공이며, 교두형 문양으로 되었다.
- 종량 상부에 인(人)자형 소슬합장을 두었다.
- 외목도리와 중도리는 대량과 종량 위에 직접 놓았으며, 주심도리는 우미량 위에 얹었다.
- 우미량을 주심도리와 중도리 사이에 사용하였다.
- 가구는 우미량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직재로 되었다.
- 내진주는 대량 밑에서 초공을 주두 위에 올려놓고 양봉으로 되어 대량을 받치고 있다.
- 포대공 최하단은 접시받침재로 되었다.
5. 기타
영암 도갑사 해탈문은 춘천 청평사 회전문(보물 제164호)과 비교되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문(山門)건축이다.
5. 1. 현지 안내문
해탈문(解脫門중국어)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부처님의 품안에 들어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2]도갑사는 신라 시대 승려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말에 크게 중흥되었다고 전한다. 해탈문은 1960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1473)에 다시 세워졌다.[2]
석조 기단 위에 중앙 칸은 통로, 좌우 한 칸씩은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기둥은 약하게 배흘림을 한 중근 기둥을 사용하였고, 전체적인 건축 양식은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다. 기둥 위 구조가 주심포식과 다포식 양식이 섞인 형태는 한국에서 유례가 드문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2]
5. 2. 사진
참조
[1]
백과사전
사회 I·문화재 > 문 화 재 > 중요 문화재 > 전라남도 > 도갑사 해탈문
https://ko.wikisourc[...]
[2]
기타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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